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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마지막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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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3 01:53 조회 5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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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군주제가 수천 년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조의 마지막 왕은 수없이 많았다. 그중 프랑스와 러시아의 마지막 왕에 관련되 이야기가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1789년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 그리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각각 왕좌에서 쫓겨나 처형당하였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

1차 프랑스 혁명으로 약 1000년간 계속된 프랑스 군주제가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1789년 6월 17일, 군주가 휘두르는 절대 권력과 성직자와 

귀족의 탐욕적인 봉건제도에 반감을 품은 부르주아의 불만을 대표하는 제3신분이 국민의회를 구성하라며 성직자와 귀족을 압박하였다.

그러자 7월 9일 루이 16세가 군대를 동원하여 제3신분을 위협하였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파리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리고 이 분노는 급진적인 혁명의 길을 열었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압제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점거하였다.

혁명주의자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살아있으면 혁명은 언제라도 뒤집힐 위험을 안고 있었다. 1791년, 혁명주의자들은

프랑스를 탈출하려던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1792년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루이 16세가

이 공화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죄를 물어 법정에 세웠다.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생의 마지막

새벽을 맞이한 후 혁명광장에 설치된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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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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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처형>


제1공화국은 1792년에서 1804년까지 12년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1804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10년 동안 그는 2번이나 왕위에서 물러났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군주제는 부활하였다.

이 군주제는 1848년까지 이어졌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리프가 폐위되었다.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4년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이 1852년에

제2제정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는 1870년 프랑스-프리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뒤 폐위되었고, 그 뒤에

프랑스에서는 제 3공화국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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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이 있기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절제와 방탕은 비참한 생활을 하던 파리 민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 루이 16세가 처형된 지 9개월 뒤에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기요틴이 설치된 사형대에 세워졌다.

그런데 기요틴을 향해 걸어가다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예요."



마지막 차르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만큼 피로 얼룩지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지배하던 러시아에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니콜라스 2세가 국민의 불만을 군대를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남아 있던 터라 국민의 불만은 혁명으로

터져 나왔다. 1917년 2월과 5월에 시중 군중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거리를 뒤덮었다. 30만 명이 넘는 군인이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지만 이들 역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3월 13일에는 순양함 오로라 호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차르는 군대까지

등돌린 뒤에야 자신에게 더 이상 권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월 15일. '협의회'를 의미하는 '소비에트'라는 임시정부가

차르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이로써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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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월 혁명>


니콜라이가 별다른 저항 없이 차르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자신의 안위뿐 아니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해서였다. 

그에게는 황세자 알렉세이가 있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는 비록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니콜라이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였다. 차르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아들 알렉세이가 아닌 미하일에게 왕위를 양도하였고,

하루 뒤에 미하일이 이를 거절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3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로마노프 왕조는 끝이 났다.

그런데 로마노트 왕가의 니콜라이 가족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은 언제든 차르가 부활 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이런 상황을

두려워한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7월 16일 니콜라이 가족을 가둔 집의 지하실로 그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일의 집행을 맡은 장교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친척들이 당신들을 구하려고 애썼습니다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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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들>


19세기 영국 황실 소속 의사 헨리 핼퍼드가 50년간이나 찰스 1세의 등뼈를 식탁의 소금 그릇으로 사용한 일이 있었다.

찰스 1세는 1649년에 처형되었고, 그의 유해는 윈저 성에 있는 성 조지 예배당에 묻혔다. 군주제가 부활한 뒤에 찰스 2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묻으려 하였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1813년에 한 인부가 우연히 헨리 8세의 무덤을 파손하였고, 그곳에는 헨리 8세의 관과 나란히 찰스 1세의 관이 

놓여 있었다. 당시에 유골을 확인한 핼퍼드는 기요틴에 잘린 찰스 1세의 등뼈 한 조각을 따로 챙겨 금을 입히고 소금 그릇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이 사실을 듣고 그것을 다시 관 속에 넣으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원숭이에게 물려 죽은 마자막 왕은 그리스의 알렉산더였다.

그는 1920년 애완용으로 키우던 원숭이에게 물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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